제8장
송태우는 3년 전부터 윤진아 그 여우 같은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여자 때문에 이 개자식이 아내와 이혼하려 한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이 쓰레기 같은 놈. 내 술 마실 자격도 없어. 지연이처럼 착한 애가, 딱 봐도 만만해 보이는 애가 어떻게 너 같은 놈을 만났을까.”
강태준이 코웃음을 쳤다.
“걔가 만만하다고? 걔가 나한테 얼마를 달라는지 알아?
190억. 이혼하는 데 190억을 달래. 벌써 서류 정리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고.”
“어? 적게 불렀네.”
두 사람은 보관해 둔 술을 거의 다 비웠다. 마지막에는 혀가 꼬여 발음도 제대로 안 됐지만, 강태준은 여전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일 오전 열 시. 안 나오는 놈이 개자식이다.”
…
강태준은 그렇게 하룻밤 동안 사라졌다. 본가 사람들은 모두 그가 어젯밤 돌아오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김지연만은 그가 한밤중에 자신 때문에 화가 나서 나갔고, 아마 옥룡만 아파트로 돌아갔을 거라고 짐작했다.
아침 식사 시간, 회장님은 또 욕을 퍼부었다.
“망할 놈의 자식. 돌아오기만 해 봐. 어떻게 손봐 주는지.”
아침 식사는 살얼음판 같았고,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강예성은 불안한 눈빛으로 김지연을 힐끔거리며 그녀가 어떻게 방에서 나왔는지 궁금해했다.
김지연은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를 무시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김지연은 할아버님과 시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홀로 집을 나섰다. 기사도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먼저 길가 약국에서 임신 테스트기 몇 개를 산 뒤, 공중 화장실로 들어갔다.
테스트기를 뜯어 설명서대로 사용하자 5분도 안 되어 선명한 두 줄이 나타났다. 남은 두 개를 더 뜯어 다시 해 봐도 역시 두 줄이었다.
김지연은 변기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그와 함께 아이를 갖는 것을 얼마나 기대했던가. 그런데 이제 이혼을 앞둔 지금, 이걸 어떡해야 할까?
강태준은 그녀와 관계를 가질 때마다 아무리 급해도 잠시 멈추고 꼼꼼하게 피임을 했다. 이 아이가 생긴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명백히 그녀와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한 번도 빼놓지 않고 피임을 했겠는가.
한참을 울던 그녀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등본은 어제 유수현의 차에 두고 내린 캐리어 안에 있었다. 먼저 유수현의 집에 가서 가져와야 했다.
그가 집에 있는지 확신할 수 없어 김지연은 먼저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린 뒤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수현아, 집에 있어?”
“말도 마. 우리 아버지가 급성 맹장염으로 간단한 수술받으셔서, 내가 밤중에 와서 간병 중이야. 아마 며칠 뒤에나 경시로 돌아갈 것 같아. 어제 강태준 그 쓰레기가 너한테 별일 없었지?”
“응, 괜찮아. 그냥 캐리어 좀 가지러 가려고. 내 등본이 그 안에 있어서. 오늘 강태준이랑 서류 정리하기로 약속했거든.”
“아, 그럼 며칠 미뤄야겠네. 네 캐리어 내 차 트렁크에 있는데 어제 깜빡하고 못 내렸어. 근데 집 비밀번호는 안 바뀌었으니까 언제든 가서 지내. 2층 객실은 항상 널 위해 비워둘게.”
김지연은 한동안 감동에 젖었다. 전화를 끊은 뒤 목적 없이 거리를 헤매다 은행을 지나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어가 자신의 은행 카드를 조회해 보니, 의외로 카드가 사용 가능했다. 강태준이 양심은 조금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카드에는 수천만 원의 잔액이 있어 당분간은 쓸 만했다.
그녀는 우선 집을 하나 빌리고, 3년 전 그만두었던 일을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
도용당한 그 루비 펜던트는 그녀가 M국의 ‘스완’이라는 주얼리 명품 회사에 그려준 작품이었다. 그녀가 맺은 계약은 반년에 한 작품씩 내는 것이었다.
이제 도용당했으니, 새로 하나를 더 만들어야 했다.
시간은 어느덧 열 시가 되었다. 김지연은 등본이 자기 손에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뻔뻔하게 강태준에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한 뒤, 조용한 곳을 찾아 강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레나 호텔 펜트하우스. 전화벨이 몇 번 울렸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강태준은 주먹질과 발길질 속에서 잠이 깼다. 눈을 뜨기도 전에 송태우가 자신에게 퍼붓는 욕설이 먼저 들렸다.
“이 개자식아, 안는 건 그렇다 쳐. 내 가슴은 왜 계속 주물럭거리는 건데?”
강태준은 술이 확 깼다. 침대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보고는 질색하며 발로 찼고, 하마터면 송태우를 침대 아래로 떨어뜨릴 뻔했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만 기억날 뿐, 어쩌다 둘이 한 침대에서 자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송태우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자기가 더러워졌다며 계속 소리쳤다.
“이 쓰레기! 완전 쓰레기야! 집에 아내 두고, 밖에는 애인 두고, 이젠 친구까지 건드려? 신장 두 개로 감당이 돼? 너 이 자식, 방금 나를 윤진아로 착각한 거 아니야?”
강태준이 자신을 그 여우 같은 윤진아로 착각하고 밤새 더듬었다고 생각하니 송태우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강태준은 시끄럽다고 느꼈다.
“무슨 소리야. 나 진아랑 그런 적 없어.”
송태우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내가 믿을 것 같아?”
“믿든 말든. 내가 너한테 뭘 설명해야 하는데. 나도 내 도덕적 기준이 있어. 이혼하기 전까지는 걔 안 건드려. 그리고 진아처럼 순수한 애가 그렇게 함부로 굴 리도 없고.”
송태우는 그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일단 믿기로 했다. 하지만 윤진아가 순수하다는 말을 들으니 또 속이 메스꺼워졌다.
“너 그거 들어봤어? 대부분의 여자는 마음으로 바람피우는 남자를 더 용서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대.”
강태준의 머릿속에 문득 한 이름이 떠올랐다. 그는 냉소하며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대체 누가 마음으로 바람을 피워서 꿈에서까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걸까?
그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
강태준은 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열 시 십오 분이었다.
김지연이 저쪽에서 기다리다 지친 건 아닌지, 전화를 받는 순간 마음이 조금 불안해졌다.
“강 대표님, 도착하셨어요?”
‘강 대표님’이라는 한마디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녀는 예전에는 늘 그를 ‘태준 씨’라고 불렀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을 끄고 부를 때는 더욱 듣기 좋았다.
강태준은 겉으로 평정을 유지하며 아무렇게나 거짓말을 했다. “아니, 거의 다 왔어.”
상대방은 몇 초간 조용했다.
“제 등본을 유수현 씨 차에 두고 내렸어요. 그분이 며칠 동안 경시에 안 계셔서, 서류 정리는 며칠 미뤄야 할 것 같아요.”
강태준이 눈썹을 치켜떴다.
“이혼하기 싫으면 솔직히 말해. 창피한 일 아니잖아.”
그 말을 끝으로 전화기에서 뚜-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송태우는 옆에서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정말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김지연은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어제 감기 기운 때문인지 아랫배가 은근히 아래로 당기듯 아프고 머리도 약간 어지러웠다.
그녀는 길가에서 택시를 잡아 병원 산부인과에 접수했다.
산부인과는 같은 층에 있었다. 임신 검사를 받으러 온 사람들은 대부분 부부였고, 남편은 로비에서 기다리고 아내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부축을 받으며 보호받는 임산부들을 보며 그녀는 한동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온갖 검사를 마친 김지연은 초음파 사진을 들고 의사 선생님을 찾아갔다.
“아기 착상 위치가 너무 낮네요. 이런 경우는 침상 안정을 취하고, 운동은 피하고, 정기적으로 와서 산전 검사를 받으셔야 해요.”
김지연은 겁에 질린 얼굴로 물었다. “선생님, 착상 위치가 낮으면 어떤 결과가 있을 수 있나요?”
의사 선생님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유산하기 쉬워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제가 말한 대로만 하세요. 과로는 피하고, 자극적인 상황도 피하고요. 시간이 지나면 위로 올라갈 거예요. 이 기간 동안만 조심하면 문제없을 겁니다. 그리고 가벼운 빈혈이 있으니 일단 음식으로 보충하세요.”
의사 선생님은 초기 몇 달간은 부부 관계를 피해야 하고, 감정적으로 격해지면 안 되며, 제철 채소와 과일을 많이 먹으라는 등 여러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그녀는 검사 결과지 뭉치를 들고 진료실에서 나와 대기 의자에 앉아 서류들을 정리했다.
옆에 있던 한 친절한 아주머니가 혼자 있는 그녀를 보고 함께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동생, 혼자 검사받으러 왔어? 남편은?”
김지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남편은 일이 바빠서요.”
아주머니는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조언했다.
“동생아, 남자는 써먹어야 할 때 써먹어야 해. 임신했을 때도 써먹지 못하면, 그런 남자 데리고 뭐 해? 임신 검사는 꼭 같이 오라고 해야지. 안 그러면 남자는 여자가 열 달 동안 임신하는 고생을 몰라.
네가 입덧으로 죽어라 고생해도 못 보잖아. 애 낳고 나면 ‘애 하나 낳은 거 가지고 뭘 그래, 여자들 다 낳는데 너만 유난이야’라고 할걸.”
말을 하던 아주머니는 갑자기 김지연을 툭 쳤다. “어머, 어머, 저기 좀 봐. 남자는 저런 사람을 만나야 돼. 잘생겼지, 아내 사랑하지. 저 조심스러운 것 좀 봐. 딱 봐도 아내 바보네.”
김지연은 고개를 들어 아주머니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봤다. 맞은편에 있는 사람을 확인한 순간, 그녀가 겨우 추슬렀던 마음은 거대한 빌딩처럼 무너져 내렸고,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